진호박's Life Style






1896년 2월 매우 추웠던 어느 날, 고종은 폭 2m도 안 되는 좁은 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피신한다. 역사는 이를 '아관파천'이라 기록했고, 고종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가비(加比, 커피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한자로 음차된 것)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영화 <가비>는 쓰지만 달콤한 커피로 자신의 삶을 위로했을 고종의 곁에 매일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고종의 커피 독살설과 스릴러를 첨가해 더욱 맛을 냈다.

김탁환 작가의 『노서아 가비』에서 가져온 캐릭터들은 영화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한번 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따냐(김소연)는 연인인 일리치(주진모)와 함께 러시아에서 커피와 금괴 등을 훔치며 먹고 산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수배로 붙잡힌 이들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고, 조선계 일본인인 사다코(유선)의 제안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사다코가 제안한 딜은 무려 '고종 암살'이다. 따냐는 고종의 바리스타가 돼 커피에 독을 타 고종을 살해하고, 알리치는 사카모토라는 이름의 첩자가 돼 조선의 군대를 무력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가비>는 시종일관 앤티크(antique)한 세트와 의상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선의 마지막 시대가 배경이지만 궁궐이 등장하지 않고, 왕이 등장하지만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지 않는다. 대신 전체적으로 흰 이미지를 띠는 러시아 공사관을 배경으로 클래식한 수트와 드레스, 다양한 커피 도구들이 등장해 동서양이 공존하는 색다른 광경을 만들어 냈다. 특히 모던한 드레스부터 몸매가 돋보이는 투피스, 전통적인 궁녀복까지 소화해 내는 김소연의 연기 변신이 돋보인다.
 



박희순이 재해석한 고종의 모습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동안 유악하게 묘사돼 왔을 뿐 아니라 때로는 조롱거리가 됐던 고종은 이번 작품에서 겉보기에는 냉정하지만 속으로는 섬세함을 지녔고, 나라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은 굳건한 군주로 묘사됐다. 박희순은 언론시사회에서 "고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왜곡된 부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들을 많이 찾아봤고, 『고종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도 참고했다"며 "고종의 당시 심경, 겉으로는 미약해 보였지만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강인한 마음을 가지려 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쓰라린 역사가 주는 애절한 분위기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력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굴러간다. 다만 각 인물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해 관객으로 하여금 한 인물의 입장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흡입력은 다소 떨어진다.
 
편집 면에서도 튀는 장면들이 몇몇 있어 '더 좋은 장면'을 끌어낼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보인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 작품이다. 만약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완성되지 않았을까 싶다.